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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림삼초대시 '해맞이'

시작하는 오늘이 바로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젊은 그 날인 것이다.

 

 

림삼 / 칼럼니스트. 작가. 시인


時作NOTE -

 

공감대라고 하는 단어가 있다.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라는 사전적 의미다. 다음은 사회적 효용성사회적 공감대를 살펴본다. 이 중 사회적 효용성은 공리주의에서 가장 잘 알려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과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특정인이나 일부에게만 효용이 미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회적 공감대는 어떤 정책이나 사안에 대해서 국민 다수가 동의하고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을 가리킨다. 무슨 말이야? 참 따분하고 재미없는 풀이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감에 대한 유명한 대사다. 몸이 많이 아픈 사람들, 사랑하는 이를 잃었거나, 경제적 고통을 겪는 이들을 보면, 내가 그렇지 않은데도 마음이 아프다. 내가 저 힘든 경우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 저 사람의 고통이 지금 내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라는 이기적인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 이기심이 때론 자신의 삶을 만족스럽게 만드는 긍정효과를 갖게도 한다.

 

하지만 비교하고 있는 고통에 처한 타인들이 과연 모두 나보다 더 힘들고, 내가 덜 불행한 걸까? 에는 절대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 “타인의 고통을 상상한다고 할 때 나는 어떤 타인을 머릿속에 그려본 다음, 결국에는 내 스스로가 아픔을 갖는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나와 동일한 사적 감각을 갖는 다른 사람을 상상한다는 가정은 헛소리다.” 그만큼 남의 고통을 함부로 나의 고통으로 치환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고통의 상상력은 사랑하는 마음과 정비례하기도 한다. 나와 가까운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은 때론 내 아픔보다 더 큰 고통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이 또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의 기만성일 수도 있다. 이 고통 속에는 나와 관계되는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와 사적인 관계가 희박한, ‘세월호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강남역 부근에서 살해당한 젊은 여인, 구의역에서 사고를 당한 나이 어린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함께 아파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이 마음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쩌면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에 우리 모두 함께 살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을 우리는 공감이라고 한다. 나쁜 행정과 강력 범죄는 그러한 공감능력의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타인의 고통을 자꾸 내 것으로 치환하려고 하며, 어떻게든 남아 있는 삶의 비빌 언덕을 찾아내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우리는 세상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들 중에서 공감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고 있다. 그것을 찾아내어 스스로 위로받으려 하고, 그것을 통해 삶의 작은 소망이라도 발견하려 애쓰면서, 그것에 깃들어 있는 의미를 인식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런 일상을 삶이라 여기면서 살아간다. 계속되는 시행착오와 방황을 거듭하면서도 새롭게 솟아나는 가능성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거기에 내일의 꿈을 얹으려고 한다. 허기사 그런 노력조차 없으면 이 허망한 세상을 무엇으로 살까?

 

어차피 다시 내려갈 걸 무엇하러 애써 산을 오르는 겐지, 그 과정 중에 흘리는 땀방울이 얼마만큼 효율적이고 이로운 행위인지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우리는 그저 무작정 산을 오르고, 또 그 산을 내려온다. 그러한 무효용의 반복에서도 우리가 갖는 작은 기쁨과 행복은 결국 인간이라는 집단에게 무한한 발전과 무구한 역사를 공존하게 해주었고, 소위 기적이라는 이름의, 행운이라는 제목의 미래를 열어 보여주었다. 우리가 어제부터 오늘을 거쳐 내일까지 쉼 없이 살아가는 이유다.

 

공감, 대한민국을 바꾼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작년 여름에 출간되어 식자들에게 골치 아픈 숙제를 슬그머니 제시한, 3명의 철학자들이 공저로 꾸민 책이다. 갈등과 그를 넘어서는 증오의 양상을 보여 주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공감 부재 대한민국의 현실로 치환하여 학술적으로 들여다보자는 것이 저자들의 제언이다. 실질적으로 세대 갈등, 젠더 갈등, 계층 갈등, 이념 갈등이 점점 증폭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정확한 단면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 구성원의 분노와 울분 지수는 다른 나라의 두 배를 넘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 원인으로 한국 사회의 공감 부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왜 우리 사회에서 공감이 부족한지, 어떻게 하면 공감을 높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공감 부족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동안 진행되어 온 연구 결과와, 수차례에 걸쳐 개최된 공감을 주제로 한 국제회의, 해외(일본, 중국, 대만, 프랑스, 미국 등)의 여러 공감 관련 학자들과 함께 논의한 내용을 묶어 위에서 제시한 질문, 즉 왜 우리 사회에서 공감이 부족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공감을 높일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1부에서는 공감이 무엇인지 학술적으로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공감과 동정의 차이, 공감의 중요 요소, 공감 능력에 대한 생물학적, 철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설명을 살펴본다. 2부에서는 다양한 학술 연구 자료 및 언론 기사를 바탕으로 공감 부재 대한민국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서 원인과 배경을 알아본다. 3부에서는 어떻게 공감이 가능한지를 미학적, 종교적, 일상성 등 여러 주제별로 다루었다.

 

4부에서는 공감의 시민을 어떻게 탄생시킬 수 있는지, 공감의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영역과 사회구조적인 영역에서 다루고 있다. 갈등과 분노를 해소할 핵심적인 키워드가 공감이라는 것에 다른 의견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공감에 관한 심층적 연구의 첫걸음이다. 혹시 짬이 난다면 잠시라도 묵언수행하는 기분으로, 약간은 심각한 분위기라도 좀 잡아보면서, 한 나절이라도 좋으니 이 책을 가까이할 기회를 만들어보기를, 그래서 공감이라는 단어와 한 번 쯤 친해보기를 권하는 바다.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신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재능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 받았다. 신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 받았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이 멋진 간증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그냥 훑어보면 당신도 아니고 필자도 아닌 듯 하다. 그렇지만 잘 살펴보면 당신이 바로 주인공이며, 필자가 바로 그 당사자다. 우리 모두의 기도는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진 건데 우리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만족보다는 불만을, 평안보다는 소요를, 그리고 꿈보다는 욕망에 집착하며, 스스로 눈을 감고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다고 소리치는 건지도 모른다.

 

진실한 행복을 바란다면, 거창하고 큰 것에서 찾지 말자. 멀리 힘들게 헤매지 말자. 그건 비록 작지만 항상 당신 눈 앞에 있는 것이다. 행복은 이기적이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남의 시선 따위는 무시해 버리자.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울 수 없다. 행복은 연습이다. 그냥 주어지는 행운의 복권이 아니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연습해야 얻을 수 있는 열매다. 가는 길은 만 갈래지만 방법은 하나다.

 

행복은 습관이다. 아는 길이 편하고 가던 길을 또 가듯이, 살아가는 동안 몸과 마음에 배이는 향기다. 하나씩 날마다 더해가는 익숙함이다. 행복은 투자다. 미래가 아닌 현실을 위해 남김없이 투자하자.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마찬가지다. 오늘을 온전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은 공기다. 때로는 바람이고, 어쩌면 구름이다. 잡히지 않아도 느낄 수 있고,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행복은 선물이다. 어렵지 않게 전달할 수 있는 미소이기도 하고, 소리없이 건네줄 수 있는 믿음이기도 하다. 가장 달콤한 포옹이다. 행복은 소망이다. 끝없이 전달하고픈 욕망이다. 하염없이 주고 싶은 열망이다. 결국엔 건네주는 축복이다. 그래서 행복은 바로 당신인 거다.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당신이다. 변함없이 사랑하는 당신이다. 이미 당신이다.

 

상처가 난 부분을 아프냐고 어루만져 준다는 것이 그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경우가 있다. 때론 득이 되라고 이야기한 것이 그에게 실이 되는 것도 있다. 마음이 앞서가는 것도 잘못이요, 너무 뒤쳐져 가는 것도 잘못이다. 모두가 인간이기에 완벽함은 없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좋은 점만 이야기하고, 상대를 위해 이야기한다 해도 좀 더 생각해보고 할 이야기들이 있나 보다. 말 한 마디의 소중함을, 말 한 마디의 향기로움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때론 선의의 거짓말이란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단어 중에 갈등이라는 단어가 있다. ‘()’은 칡을 의미하고, ‘()’은 등나무를 말한다. 칡과 등나무는 둘 다 줄기가 땅 위를 기면서 자라든지, 아니면 다른 나무나 물체에 의지해 자라는 덩굴식물이다. 그러나 같은 덩굴식물이라도 칡은 오른쪽으로 덩굴을 감으면서 나무를 타고 오르고, 등나무는 왼쪽으로 나무를 감으며 타고 올라간다. 여기서 칡과 등나무가 만나 서로 얽히면, 그것을 풀어내기가 매우 힘들다는 의미에서 갈등(葛藤)이란 말이 나왔다. 우리 사회의 갈등(葛藤)은 공감하지 못하고 서로 이해 관계가 다른 것에서 비롯된다.

 

논어에서는 사람이 이익만을 따라 행동하게 되면 원망이 많아진다.”고 하였다. ‘공자의 말씀처럼 서로의 욕심이 부딪치는 곳에서 서로에 대한 원망이 생겨나고 갈등(葛藤)이 생긴다고 했다. 갈등을 만드는 건 상대의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받아들이는 나의 해석이다. 나의 해석을 결정짓는 요소를 갈등학에서는 스토리(story)’라 부른다. 내가 어떤 스토리를 갖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럼 갈등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 스토리를 다시 쓰면 된다. 똑같은 행동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갈등을 해결하는 스토리의 힘이다. 당신과 갈등하는 상대를 떠올려 보자. 그리고 당신이 그 상대의 행동에 어떤 스토리를 썼는지 점검해보자. 상대에 대한 편견으로, 들리는 소문 때문에 색안경을 쓰진 않았는가? 짜증 대상에서 고마운 관심으로 탈바꿈하면 갈등이 없어진다.

 

, 이제 스토리를 다시써볼 차례다. 상대 처지에서! 그러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 갈등(葛藤)이 사라질지 모른다. 해묵은 난마처럼 얽혀진 갈등을 해소하는 언행으로 인격을 쌓아 가면서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기 기원한다. 어쩌면 올 한 해의 운수와 행복은 스스로가 짓는 복의 크기에 비례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넓은 마음과 후덕한 인심으로 한 해의 깊이를, 크기를 가늠하면서 일상에 깃들어 있는 하늘의 복을 차근차근 주워서 엮어나가자.

 

지난 1970년대 전주에 지방시찰 차 머문 저녁에, ‘박정희 대통령이 술을 마셨다. 다음날 아침 수행원이 박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욕쟁이 할머니 식당에 가서 콩나물 국밥을 배달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욕쟁이 할머니는 와서 처먹든지 말든지 해!” 하며, 소리를 질렀단다. 욕쟁이 할머니의 불호령에 그냥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수행원은 그 사실을 박대통령에게 알렸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박대통령은 껄껄 웃으며, 손수 국밥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대통령이라고 생각지 못한 욕쟁이 할머니는, 평소대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단다. “이 놈 봐라. 니 놈은 어쩌문 박정희를 그리도 닮았냐? 누가 보면 영락없이 박정희로 알겄다, 이놈아. 그런 의미에서 이 계란 하나 더 처먹어라.” 욕쟁이 할머니와 따뜻한 서민대통령의 거짓말 같은 실화는, 지금까지도 전주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이념을 떠나서 인정과 소통이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던 그 시절의 이야기다.

행복해서 노래하는 게 아니고 노래하니까 행복해진다고 했다. 누구 하나 삶이 힘겹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처럼, 힘겨움과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행복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하루 단 1분이라도 스스로를 향해 웃는 시간을 가진다면 힘든 일도 어느 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새롭게 자신을 변화시키는 즐거운 날, 어떤가? 오늘 당장 시작해보는 것이.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때가 가장 이른 것이라는 말처럼, 시작하는 오늘이 바로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젊은 그 날인 것이다.

 

침 뱉은 우물 다시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사람은 좋거나 싫거나 남의 말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주고받은 말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되돌아가는 법이다. 말을 주고받을 때, 좋은 덕담이면 약이 되지만 헐뜯고 깎아 내리는 악담이면 반드시 독이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일은 짧은 세 치 혀가 비수가 되기도 하고 독화살이 되는가 하면, 잘 쓰기에 따라서는 상처를 치료하는 영약이 되고

사랑을 일구는 묘약이 되기도 한다.

 

덕담은 사랑을 낳고, 우정을 다지고, 세상을 이롭게 한다. 덕담하는 사람은 복을 받고, 악담하는 사람은 화를 입는다. 그러니 우린 덕담을 하자. 남에게 덕담하는 것이 곧 스스로를 향해 덕담하는 것이다.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려냈다는 중국 선진 시대의 유명한 의사이다. 그의 두 형도 모두 의사였는데 삼형제 중 유독 막내인 편작만이 명의로 이름이 나 있었다.

 

어느 날 위나라의 임금이 편작에게 조용히 물었다. “솔직히 그대 삼형제 가운데 누가 의술이 가장 뛰어난가?” “큰 형님의 의술이 가장 훌륭하고, 저의 의술이 가장 비천합니다.” 당연히 명의로 이름난 자신의 의술이 가장 뛰어나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을 들은 임금은 그 이유가 궁금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편작 너의 이름이 백성들 사이에 더 알려져 있느냐?”

 

사람들은 병이 깊은 환자들에게 약을 먹이고 살을 도려내는 수술을 하는 저의 행동을 보고 제가 자신의 병을 고쳐 주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명의로 소문난 이유입니다.” 임금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형들은 왜 명의로 소문나지 않는 거냐?” “둘째 형은 환자의 병세가 미미한 상태에서 병을 알고 치료해 주기 때문에 이런 환자는 둘째 형이 자신의 큰 병을 낫게 해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큰 형님은 상대방의 얼굴빛을 보고 그에게 장차 병이 있을 것을 짐작하고, 병의 원인을 미리 없애 주지요. 그러니까 아파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치료를 받기 때문에 그들은 큰 형님이 자신의 고통을 없애 주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제야 임금은 훌륭한 사람이 모두 유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편작의 형들처럼 남들이 알아주는데 연연해하지 않고 묵묵히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그것을 통해 행복을 얻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한테도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참혹한 고통이다. ,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죽음과 같다.” 라고 한 라이크스터의 말처럼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할 줄도 모른다. 그러나 받아본 사람은 사랑할 줄 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높은 자리에 있어도,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슬픈 일은 없다. 그래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아랫 사람들은 밥 한 그릇도, 차 한 잔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아도

가슴은 늘 텅 비어 있다. , 권세, 명예? 다 부질없다. 사랑으로 나누어야 행복해진다. 경자년 새 해가 시작되고 이제 열흘 남짓 지나고 있다. 당초에 우리가 작심한 모든 포부와 각오들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조심스레 행보를 되짚어볼 시점이다. 제대로 걸음을 떼기 시작하였는지, 힘차게 휘두르는 팔이 정작 자신의 걸음에 보탬이 되고는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진솔한 행복과 보람찬 소망에 맞닿아 있기를 원한다면, 혼자만의 아집이나 독선에 치우치지 말고, 중용과 공감의 미덕을 배우기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와 도리가 어디까지인가를 가늠하되,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 기꺼이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행실과 언사로 세상에 향기를 펼쳐나가는 데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정초 산행길에 필자가 배운 진리이며, 마땅히 수행해야 할 과제인지라, 오늘도 햇살에 자아를 투영해 비추이며 신선한 아침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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