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詩作NOTE -
유난히 짧은 계절인 가을은 하루의 길이도 짧은 건가? 이상스레 요즘은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아침 일찍 눈을 뜨고 바쁘게 움직이다보면 금세 하루 해가 저물고 이어서 밤 깊어져 곧장 잠 자리에 들 시간이 오고 만다.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미처 곱씹을 새도 없이 잠에 빠져들지만, 밤 새 선잠에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다가 새벽을 맞이한다. 그러니 의례 몸이 찌푸둥하고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건 당연한 귀결이라, 허겁지겁 살아가는 근동의 삶이라는 게 남의 이야기같아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이렇게 겅중겅중 가을의 마수에 사로잡혀 어설프게 주연배우 흉내를 내다보면 또 곧장 이 계절은 저물텐데 하는 조바심으로, 문득 오늘만큼은 기필코 의미있는 하루의 삶을 살아내리라 다짐을 하면서 집을 나선다. 이런 기백으로 오후 시간까지는 뭔가 이룰 수 있다는 의욕과 기대를 갖고 호흡할테지만, 그 뒤에는 또 판에 박은 듯한 포기와 체념으로 건설적이지 못한 일기장을 대하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찌 그리 지치지도 않고 매일 뭔가를 기다리는지, 어떤 때는 쳇바퀴같은 상념이 야속해서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어쩌랴! 누구나가 겪는 일상의 고민이며, 살아있는 한 끝내 버리지 못할 숙명인 것을. 가을의 어느날 오후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이 부지런히 흐르고 있다. 저마다 뭔가 사연을 만들어보고 싶어 나름 색다른 일상을 시도해보면서 가을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 아마도 짧은 가을임에도 누구에게나 유난히 긴 이야기들이 많이 생겨나는가보다. 여행을 하고,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카페에 앉아서 쓴 커피를 벗하며 대화를 하고, 그렇게 모두의 가을 이야기는 무르익는다. 가을이니까.
‘가을 이야기’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각본인 1998년작 프랑스의 영화다. 감독의 '사계절 이야기' 연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제55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아 ‘골든오셀라상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한 수작이다. 사실 내용은 그다지 극적이거나 번득이는 재치가 엿보이는 명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영화에서 미망인 ‘마갈리’는 포도농장을 운영하며 금욕적인 삶을 살고 있다. 친구 ‘이자벨’은 그녀에게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주려고 몰래 신문에 구인광고를 내고, 이들의 여자친구인 ‘로진’은 자신의 철학교사였던 ‘에티엔’을 곁에 두고 싶은 마음에 그와 ‘마갈리’를 맺어주려고 한다는 상투적인 전개로 이어진다.
그런데 영화의 배경에 가을이 있고, 그 가을에 어울리는 사연이 은은하게 전개되면서 관객들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감동의 세계로 유혹당한다. 그리고는 이내 영화 속의 한 사람으로 몰입하게 되는 묘한 마력을 느끼게 된다.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한참동안 가을의 이야기에서 헤어나오기 힘든 뭔가가 그 속에 숨겨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끝까지 OST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 거의 대부분 등장인물들의 대화로 영화가 이뤄져 있어서 어찌보면 독립영화의 냄새가 나기도 한다. 그래서 평소 상업영화를 많이 보는 일반인들에게는 나름 색다른 경험을 주게 될 것이다.
당연히 조금은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가을을 나타내는 색감이 너무 예쁘고, 가로로 엄청나게 긴 요즘 영화와 달리, 좀 과장해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면 비율은 나름 흥미롭게 다가온다. 아울러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담백하고 잔잔하고 소소해서 인물의 감정선을 스스로 포착하도록 만드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한 씬 당 투자되는 시간, 그러니까 영화의 호흡이 꽤나 여유롭고 긴 편이었는데, 이것도 상업영화에 절여진 사람들에게는 꽤나 신선한 충격이 될 듯 하다.
상업영화였다면 다 잘라버렸을 앞뒤 장면도 모두 넣어버린 느낌 덕분에 영화를 본 소감이 아니라, 정말로 어떤 사람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느낌까지 들 정도니까 말이다. 내용도 자극적이지 않고 자주 미소를 짓게 되는 귀여운 내용이라 마음이 편해지는 영화이니만큼 이 가을에, 가을 이야기를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면 함께 대화에 참여한다는 기분으로 한 번 쯤 가볍게 대해보는 건 어떻겠나 권장하고 싶다.
끝처럼 보여도 끝이 아니라고 말하는 화자를 우리는 좋아한다. 살아가는 한 마감이란 추상적 개념에 불과할 뿐, 매번 어떤 선 위에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우울, 성공, 좌절과 환희도. 때때로 이 지점을 종결처럼 느끼기도 하기에 누군가가 말해주면 더 좋게 여겨진다. 로메르의 가을 이야기는 가을의 포근한 단풍 색감처럼 부드러운 형태의 감정을 충분하게 보여주는, 그래서 짐짓 차가운 마음이 될 수도 있는 이 계절을 훈훈하게 채색시켜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이다.
가을에 걸맞게 좋은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 둔 사람은 행복하기 마련이다. 만남이 주는 기쁨도 기쁨이겠지만, 멀리서 서로를 생각하고 추억을 공유하며, 서로의 기억 속에서 살아 있으니 그 자체로 힘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를 응원하고, 가끔은 목소리 듣고 싶다고 연락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소소한 행복이다. 우연히 만나더라도 늘 만나며 지내는 사이처럼 주위의 공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관계, 우리 가슴에 좋은 사람 하나 쯤 담아 두고 살아간다면 참 좋겠다.
삶이라는 넓은 정원 속에 예쁜 꽃들이 필 수 있도록 행복해지는 연습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만큼 행복한 삶이 있을까 싶다. 행복을 저해할 정도로 현실이 혹여 힘이 들다면 이미 지나간 일은 돌아보지 말고, 힘겨운 현재에 머물지도 말고, 그냥 페이지를 넘기도록 하자. 지금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는 것 뿐이다. 페이지를 넘기는 일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그리고는 그 페이지를 새롭게 써나가면 되는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다시 꿈꿀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다시 뛸 수 있고,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삶은 뜨거운 것이고, 살아봐야 삶이 되는 거다. 그러니 끌어안고 화를 내지 말고 페이지를 넘기도록 하자. 화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화를 안고 사는 것은 독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 화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하며 삶의 많은 문을 닫게 한다.
따라서 화를 다스릴 때 우리는 미움, 시기, 절망과 같은 감정에서 자유로워진다. 남들과의 사이에 얽혀있는 모든 매듭을 풀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밭이다. 그 안에는 기쁨과 사랑, 즐거움과 희망과 긍정의 씨앗이 있는가 하면 미움, 절망, 좌절, 시기, 두려움과 같은 부정의 씨앗도 있다. 어떤 씨앗에 물을 주어 꽃을 피울지는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나 실제로 행복을 만끽하면서 사는 사람은 드물다.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표정에서도 알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은 늘 미소짓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얼굴을 찌푸리며 온통 찡그리고 있다. 목하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이 가을에 행복한 가을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장만하여 세상 가득 행복의 씨앗을 퍼뜨리는 행복 전도사가 되어봄은 어떠한가? 어느날 오후에 가을을 사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