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삼 /칼럼니스트/작가/ 시인
- 詩作NOTE -
외롭다. 고독하다. 세상 넓은 공간 아래 홀로이 남겨진 느낌이다. 뭇 사람들 흔적 이리 진하고 소란스러운 세상사 열심히 돌아가는데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느낌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니 의례 외로울 밖에. 눈 감고 귀 막고, 모든 감각을 스스로 폐쇄한 채 세월 앞에 혼자 섰으니 당연히 고독할 밖에. 어떤 소통도, 어떤 교류도 이루어지지 않는 단절, 그 엄청난 사실 앞에서 필자는 서럽게 서럽게 통곡을 한다.
그러다가 깼다. 꿈이었구나. 이토록 온 몸의 진이 다 빠지도록 지독하게도 허무한 꿈이라니... 몸부림도 울부짖음도 다 날아가버린 잠 자리에서 한동안 멍하게 어두운 허공을 바라보다가 언뜻 지금은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새벽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바로 더욱 쓸쓸함이 몰려온다. 꿈 속에서의 진한 외로움은 아니지만, 그래도 퍽이나 심각한 마음의 울림이 분명한 고독의 종을 울린다. 이내 그 울림이 그리움으로 피어오른다. 상실감 가득 담은 채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으로.
저절로 눈물이 난다. 슬그머니 맺히던 눈물이 문득 설움과 합쳐지더니 금세 걷잡을 수 없는 울음으로 변한다. 듣는 사람 없지만 소리내 울기는 웬지 남사스러워서 입 틀어막아 소리를 죽이자니 웬걸, 더욱 큰 소리가 새어나온다. 결국 시원스레 한바탕 울음으로, 속에 맺혔던 감정들을 쏟아내고 나서 부스스 일어나 책상머리에 앉는다. 글이라도 좀 써볼까? 이별 편지 쯤의 제목 실하게 붙이고 빼곡이 사연 적으면서 한 두어장 채워볼까나?
아무래도 그런 저지레라도 좀 해야 진정이 될 듯 하다. 새삼스럽게 이 나이에 대관절 외로움이니 고독이니, 뭐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해대고 있는 겐지. 허기사 꿈의 원인이 된 거라고 해 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주에도 친구 하나가 먼저 멀리로 가버렸다. 모였던 친구들끼리도 나누는 대화랍시고 누가 떠났고, 누구는 어디가 아프고, 누구는 요양원에 들어갔고 등등, 아니 들음만 못한 이야기들 뿐인지라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말았었다. 자연의 섭리대로, 하늘의 뜻대로 사람의 생사화복이 결정되어지는 건데 그걸 주제 삼아 떠들면 뭐가 달라지겠는가?
우리 나이에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순리대로 살아가면 되는 거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고, 그런 인연과 윤회의 큰 그림을 어설프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고희를 넘는 나이들이거늘, 새삼 참새방앗간 마냥 소란 떨며 찧고 까불 일은 아니잖는가? 또한 혼자 있을 때도 외로움을 타거나 고독에 젖어있지 말고, 조금은 성숙된 인격과 성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달관과 터득의 시선으로 만사를 관조할 줄 알아야 하겠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 황혼길에 주어지는 노년의 의무요,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대면의 자세인 것이다.
앞으로는 꿈도 그런 의미에서 점잖고 거창한 내용과 소재로만 골라서 꾸어야겠다. 누군가 물어봐도 꿈 때문에 괴로워하고 더 슬퍼하는 팔푼이는 아니라고 떳떳하게 답변할 수 있는 멋진 늙은이가 되어야겠다. 그게 품은 소망이며 남은 바람이다. 대저 그 꿈이란 것, 마음 먹은대로 꾸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흥미로운 숙제 하나 마련하면서 맞이하는 여명이다.
아주 어렸을 때는 어른만 되면 뭐든지 다 해낼 줄로 알았다. 젊었을 적에는 나이 더 먹어서 중년만 되면 세상 모든 난관을 거뜬하게 헤쳐나가는 능력이 생겨날 줄로 믿었다. 그리고 장년이 되면서는 늙어지면 마냥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안목으로 세상만사를 통달하는 버릇이 생성되는 거라고 여겼었다. 그리고 많이 늙어버린 지금은 지난 세월들이 아쉽고 후회스러워 땅을 치고 세월 무상이나 외치며 탄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일생의 얼굴인 것도 더불어 터득하고 있음이다.
젊으나 늙으나 살면서 우리가 남들에게 해야 할 말은 “힘을 내세요.”라는 말이라고 한다. 누구나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힘이 난다고 한다. 또한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걱정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리고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또 다른 말은 “용기를 잃지 마세요.”라는 말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용기가 생겨난다고 한다. 자신에게나 남들에게나 수시로 이런 말들을 해야 할 것 같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나이 먹어서 신경써야 할 사항이라고 하면서, 혹시 좋은 것이 있으면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옷장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옷, 예쁜 옷, 훗날 잔칫날 입는다고 아끼지 말란다. 그러다가 철 지나면 헌 옷이 되고, 행여 입어볼 기회조차 잃을지도 모른단다. 마음 또한 아끼지 말라고 한다. 마음 속에 들어있는 사랑스런 마음, 그리운 마음, 정말로 좋은 사람 생기면 준다고 아끼지 말라는 거다. 그러다가 마음의 물기 마르면 정작 주지도 못하는 노인이 되고 만다나.
좋은 음식 있으면 먹고 싶을 때 먹고, 좋은 음악 있으면 듣고 싶을 때 듣자. 더구나 좋은 사람 있으면 마음 속에 숨겨두지 말고, 마음껏 좋아하고, 마음껏 그리워 하자. 그리하여 때로는 얼굴 붉힐 일, 눈물 글썽일 일 있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정녕 살아있음의 표증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바로 앞에 꽃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지 않나? 그럼 그 꽃을 마음껏 좋아하고, 그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 하자. 누가 그런 얘기 하느냐고 묻거든 림삼이 그러더라 하라.
살아가다 보면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좋은 친구가 더 필요할 때가 있다. 만나기 전부터 벌써 가슴이 뛰고, 바라보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그런 사람보다는,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편안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더 그리울 때가 있다. 길을 걸을 때, 옷깃 스칠 것이 염려되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어야 하는 그런 사람보다는, 어깨에 손 하나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더 간절해질 때가 있다.
너무 커서, 너무 소중하게 느껴져서, 자신을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보다는, 자신과 비록 어울리지는 않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더 절실해질 때가 있다. 그게 삶의 소박한 매력이며 맛깔스러운 마력이다. 이제 하나 둘씩 떠나가는 친구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면서, 오히려 남아있는 친구들이 더 적어지기 시작하면, 그 때는 외로움과 고독을, 그리고 그리움과 보고픔을 곱씹기 보다는, 얼른 일어서서 멀지 않은 곳의 친구를 찾아야겠다.
그리고는 반갑게 손 맞잡고, 허허롭게 지나쳐온 우리들의 삶이 비록 순탄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퍽이나 아름다운 무지개였다는 걸 되새김하면서, 우리 후손에게로 이어질 역사의 다리가 되었다는 만족을 느껴보아야겠다. 지는 황혼이 얼마나 멋지고, 스러져가는 노을빛이 얼마나 그윽한가에 대해서도 큰 소리로 말해보아야겠다. 이 나이에 기 죽을 일 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