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삼/칼럼니스트. 작가. 시인
- 詩作NOTE -
사람이라는 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지극히 이기적인 본성에 파묻혀 사는 존재인지라,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타산적인 바람을 상식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또 나약한 실체라는 건 잘 알기 때문에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해서 막연한 소망이나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어서, 각자의 마음 속에 신앙의 씨를 심어놓고 간절한 염원 담아 그 대상에게 간구를 한다. 소위 기도라는 유형 무형의 의식을 통해서 무언가를 이루게 해달라는 속내를 간절히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정작 종교의 실체이며 정의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엄숙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느니만큼, 섣불리 종교와 신앙의 본질을 속단하거나 폄훼할 의도는 없다. 그리고 필자 또한 모태신앙이라는 스스로의 궤에 갇혀 평생 피난처로 여기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힘들고 버거운 삶의 질곡을 지날 때마다 필자는 아주 진솔하게 기도를 올렸음을 고백한다. 제발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게 해달라고, 바라기에는 이번 기회에 내가 바라는 걸 이루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기도라는 게 사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의 만족이나 목적 달성을 위해서 구하고 바라는 넋두리의 모음이다. 다른 사람을 향하는 축복의 마음이나 축원의 기도는 여간해서는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필자처럼 단순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를 일삼는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억지가 가미된 사견일지 모르지만, 아무튼 보통의 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처럼 여기게끔 다분히 어떤 치장이나 포장을 하더라도 기실 속사정은 스스로의 요청을 신이 이루어주길 바란다는 게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는 아니지만 필자는 기도를 할 때 늘 조심스럽다. 오늘의 이 기도도 혹시 자신만의 또 다른 만족을 추구하는 강요나 요청은 아닌지, 기도라는 제목으로 신에게 어떤 거래를 제안하는 건 아닌지, 아니면 이런 기도를 하고나서 이젠 할 도리를 다했으니 결과나 기다려보자는 배짱을 부리려고 하는 건 아닌지, 아무튼 그래서 필자의 기도는 이토록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초보자인 양 낯설고, 그렇기에 더더욱 하무맹랑하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사전에서도 ‘기도’의 정의를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빎. 또는 그런 의식’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게 바로 사람의 무능력과 나약함이다. 언제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으스대지만 실상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개체보다도 육체적으로 나약하고 불량한 건 부인할 수 없다. 단지 뛰어난 두뇌가 있기 때문에 그 나약하고 불량스러움을 감추고 숨기면서, 그걸 보강하는 수단과 매체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에 오늘날 이 세상에 군림하는 왕좌를 차지했고, 이에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음이다.
아울러 스스로 알고 있는 치부나 가려진 부분까지 은폐하려는 시도가 완전무결한 만족을 향한 이기심으로 곁들여지면서, 현대 사회에서 정신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종교는 실생활의 일부가 되어 널리 성행하고 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교과 분파들이 세계 도처에서 그 존재 가치를 활발하게 뽐내고 있다. 아마도 정상적인 종교인이나 성직자가 아니면서도 신앙에 삶의 전부를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일 게다.
어쩌다보니 시작노트의 소재가 지극히 한 쪽으로 치우쳐졌다. 가능하면 종교 이야기는 자제하기로 한 필자의 의도가 무색해진다. 이 쯤에서 중단하고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주제로 돌아가보자. 사실 사람 산다는 것이 거의 비슷한 모양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나와 똑같은 외로움 속에서 몸부림을 친다. 남과 비교하면 다 내 것이 작아 보인다. 하지만 나에게만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을 들어가 보면 누구에게나 아픔이 있다. 그러니 괜히 비교해서 불행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어떨까? 들여다보면 인생은 희극처럼 살기에도 짧은 시간이다. 구태여 비극의 주인공이 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감사는 천국이요, 비교는 지옥’이라는 말도 있다. 언제나 아침엔 상쾌한 마음으로 시작하고, 하루 종일 가능하면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행복하고, 더 많이 사랑받는 멋진 나날이 되기를 기도하자. 지금 살아있다는 이 모두가 은혜이며 기적인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표정이 밝고 잘 웃는다. 그에 반해 불행한 사람은 언제나 얼굴이 어둡고 잘 찡그린다. 잘되는 사람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다. 그러나 잘 안되는 사람은 소극적이고 불평이 많다.
또한 성공한 사람은 낙천적이고 희망적이다. 그런데 실패한 사람은 비평적이고 이유가 많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태도가 그 사람의 인생을 만들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힘들더라도 웃음을 잃지 말아야 하고, 어렵더라도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하며, 잘 안되더라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이며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는 삶의 이정표다.
다시 요약해보자.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세 가지 버릇을 바꾸면 된다. 첫째는 마음 버릇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버리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둘째는 말 버릇이다. 비난과 불평은 삼가고 칭찬과 감사를 입버릇으로 만들자. 셋째는 몸 버릇이다. 찌푸린 얼굴보다는 활짝 웃는 사람, 맥없는 사람보다는 당당한 사람이 성공한다.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독서와 교육, 그리고 훈련을 통해 마음 버릇, 말 버릇, 몸 버릇을 바꾸자. 성공도 버릇이요, 실패도 버릇이다.
깨와 소금을 섞으면 깨소금이 되듯, 깨와 설탕을 섞으면 깨달음이 탄생한다. ‘뉴턴’과 사과와의 인연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낳았고, ‘잡스’와 애플과의 만남이 세상을 바꿨으며, ‘유성룡’과 ‘이순신’과의 인연은 나라를 구했다. ‘원효대사’는 해골바가지를 만나서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듯, 인생 길에는 수많은 인연의 깨달음들이 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주의 섭리를 깨우칠 수도, 스치는 바람에도 계절의 원리를, 서로 나누는 악수에서도 사랑을 깨닫는다.
모든 것에는 존재 이유가 있다. 내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그것은 감사하고 사랑하며, 나누고 베풀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유가 되고 의미가 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세상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살 만한 누리가 되어질 것이다. 누군가 언제 어디서나 부담없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삶의 태도와 자세가 요구되는 이유다.
일을 하다가 문득 생각나 전화를 걸면, 받자 마자 “내가 하려고 했는데.” 하고 말하는 싱거운 사람. 서점에 들렀을 때 공감하는 것이 똑같다 여겨져 같은 책을 두 권 사게 만드는 사람. 거울 속의 나이 든 나에게 생동감을 일깨워 젊음의 미소를 짓도록 하는 사람. 슬그머니 가슴에 내려앉아, 안 좋아하는 커피지만 하루에 두어 잔은 꼭 마시게 하는 사람. 누구의 글을 읽던 자신의 느낌을 글로 피력하거나, 작가의 의도를 진지하게 헤아리려는 사람. 와인보다 더 부드러운 음악을, 불 꺼진 방에서 홀로 들으며 허밍을 하는 낭만과 정서를 가진 사람. 그러다가 그 음악을 함께 듣자며 넌지시 권하는 사람, 이런 친구 한 번 만나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먼저 그런 사람이 되고자 애써보자, 그거면 된다. 그러면 다 되는 거다.
오늘 작심하고 ‘축복의 미래를 위한 기도’를 올린다. 이 기도는 분명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한 기원이다. 7월이 저무는 여름의 한 구비에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기도를 올리면서, 필자는 이 기도의 힘이 그 사람에게 닿기를 바란다. 그 사람의 일상에 스며 늘 행복하고 형통하기를 기원하다. 언제까지라도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그 사람의 삶의 여정이기를 간절함 실어 간구한다. 그 사람은 바로 이 글을 읽는 당신이다. 지금 당신을 위한 기도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