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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림삼초대시 "신 (新) 사모곡"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는다.”


 

     림삼 / 칼럼니스트. 시인


- 詩作NOTE -

무려 다섯 해 남짓 동안 매 주 거르지 않고 시작노트를 적다보니 이제는 밥 먹고 잠 자는 것처럼 일상이 되어버렸다. 좋은 의미에서 버릇처럼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때가 되면 원고 작성하고, 언론사의 편집팀으로 메일을 보내고, 그리고 시와 함께 소개된 시작노트의 글을 누가 읽든 안 읽든, 크게 개의치 않게 되었다. 허기사 어떤 때는 보내놓고 게재가 되었는지 필자조차 별로 관심이 없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다.

사실상 글을 쓴다는 게, 시작노트를 작성한다는 게, 그리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관심 가져주는 이들이 별로 많지 않고, 독자들이 내용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 해도, 엄연히 필자는 매 주 이 시작노트를 적어가는 일이 나름 엄숙한 영혼의 세척이며 확인이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의식과도 비슷하며, 때로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계획하는 교두보가 되기도 한다. 혹은 필자가 세상을 향한 고백의 외침소리이며, 또는 필자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대접을 반사시키는 거울의 역할로 삼기도 한다.

지나치게 길고 장황하게 시작노트를 작성하기 때문에 오히려 독자들이 미리 지루함을 느끼거나 지레 겁을 먹고는 아예 읽기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는 지적도 받아보았고, 더 좀 간단 명료하게 글을 써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하게 드러내라는 주문도 간혹 받는다. 안다. 다 안다. 필자의 글이 재미도 없고 주제도 뚜렷하지 않으며, 호소력도 일천하여 매 주 그 밥에 그 나물처럼 교훈과 계몽을 주제로 하는 고리타분한 제안이라는 것도 익히 알고 있다. 소재도 불분명한데다, 이것 저것 잡동사니같은 예화들의 모음집에 불과하다는 충고도 기꺼이 마음으로 기울여 듣는다. 흔한 사랑 타령이나 남발한다는 모욕까지도 감수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여러 가지의 다양한 지적이나 충고에 정말 고마움을 느낀다.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는 독자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다. 적어도 그들은 필자의 글을 읽어보았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보잘 것 없는 필자의 글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시간을 할애해주었다는 반증이 아닌가? 물론 요즘처럼 살기 힘겹고 각박한 세상에 마음먹고 남의 글을 읽는다는 것도 그리 쉬운 건 아니다. 게다가 사는 데 별로 보탬이 되지도 않는 무의미한 글일수록 작은 관심조차 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말한다. 꼭 많은 시간을 내서 끝까지 다 읽으라는 게 아니다. 그저 잠시 잠깐 짬이 나는대로 한 단락이라도, 소개하는 우화 하나라도, 독자들이 읽어주면서 조금이라도 힐링이 된다던지, 휴식에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해서 극진한 바람을 담아 제언한다. 독자 제현들이시여! 림삼의 시작노트는 당신의 가까운 벗입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주머니 속의 손수건처럼 잠깐씩 필요할 때 마다 꺼내서,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시구려. 짝사랑을 고백하는 듯 하여 자못 떨리면서도 민망하기는 하지만 림삼의 진심임은 분명타.

절기를 무색하게 만드는 폭염이 연일 기승을 부린다. 이젠 좀 그만 둘 때도 되었거늘 지겹기만한 이 무더위는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언제까지 이럴 건지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낮이고 밤이고, 일부러 껀수를 만들어서 시원하게 냉방이 되어있는 장소를 찾느라고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그렇게 나름 힘겹게 여름을 견디다가, 지난 주 몇몇 뜻이 맞는 지인들과 ‘일일봉사활동’이라는 제목으로 어느 장소를 찾게 되었다. 무려 111년 만에 찾아온 한반도 폭염, 재난 같은 무더위에, 그곳은 속속 대책없이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는 재난의 현장이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쩌면 거기는 감금 생활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하지 않은 곳이었다. ‘뚝방촌’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지역, 한 평 남짓 쪽방이 옹기종기 모인 경기도 ‘광명시’의 판자촌 마을이었다. 딱히 달리 지어진 지명이 없고 그냥 뚝방촌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지독한 더위를 맥없이 견디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온이 ‘35도’에 육박하는 한낮, 오전 시간임에도 당시 쪽방 안 온도는 ‘39도’, 창문이 없기에 뜨거운 열기가 빠져나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40도를 넘나드는 불구덩이 방안에 화상까지 우려되는 상태, 온갖 온열질환이 두려운 어르신들!

갑작스러운 호흡곤란과 열 실신을 걱정하며 오늘도 좁은 골목으로 나왔지만, 골목도 재난지역인 건 매 한 가지였다. 하루 동안의 봉사활동과 구호물품으로는 근본적인 대책도, 방안도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변죽만 살짝 울리고 막막한 시선을 뒤로 한 채 매몰차게 떠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어르신들의 시선은 냉담하고 허전한, 한 마디로 영혼이 비어있는 것 같은 눈초리였다. 약 30가정에 천연 방향제와 비누, 그리고 모기약, 쌀과 조미료 등 여름나기에 꼭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느라고는 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정성이라 돌아오는 일행의 발길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필자의 시작노트도, 그 보다 우수하고 뛰어난 논객들의 촌철살인의 글들도 사실 이 더위에 사람들의 근본적인 고충과 애환을 타개하는 데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당장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가 관건인데 무슨 말라비틀어진 마음의 힐링이며, 영혼의 양식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래서 또한 필자는 조심스레 제언한다. 이번 주에는 이 시작노트를 아무도 안 읽어도 좋으니, 대신 그 시간에 눈을 감고 어려운 우리의 이웃을 한 번만 더 생각하고, 혹시 여건이 된다면 작은 관심과 성의를 기울여주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실천의지가 병행된다면 더욱 금상첨화이겠고.

‘춘천’에 위치한 5평 남짓한 좁고 허름한 ‘꽃돼지분식’이라는 떡볶이집이 있었다. 가게의 월세는 10만 원이지만 주인 할머니는 그 월세 내기도 항상 빠듯했다. “할머니, 그만 주셔도 돼요.” 저렴한 가격에 너무도 푸짐하게 떡볶이를 계속 퍼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어머니 곁을 지켰던 외아들 역시도 안타깝게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는 슬픔을 떨쳐내기 위해 계속 떡볶이를 만들었고, 어린 손님들이 배부르게 먹고 행복해하는 모습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 앞에 큰 도로가 생기면서 할머니의 가게는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월세 10만 원 내기도 어렵던 할머니가 새 가게를 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자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의 나눔과 떡볶이를 먹고 자란 사람들이 꽃돼지분식을 없앨 수 없다면서 우르르 들고 일어났다. “저는 가게 간판을 만들어 드리지요.” “그러면 저는 의자와 테이블을 마련하겠습니다.” “가게 내부 공사는 나에게 맡겨요.” 심지어 32년간 인연을 맺은 수많은 사람이 십시일반 모금하여 새로운 가게를 위한 보증금까지 마련하였다.

새로운 가게를 개점하는 날 할머니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릇 가득 떡볶이를 퍼주고 계시다. 제아무리 산해진미를 즐긴다 해도 집밥은 언제나 맛있고 그리운 것이다. 그 집밥은 기발한 요리법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특별한 조미료가 사용된 것도 아니다. 어쩌면 꽃돼지분식의 떡볶이도 집에서 먹는 집밥처럼 평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떡볶이에는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할머니만의 맛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맛집보다 뛰어난 맛을 가진 맛집이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마음이 평온함을 뜻한다. 외부의 여건이나 상황이 사람의 행복을 좌우하는 세상이다. 마치 보여지는 어떤 것으로 행복의 척도가 확연하게 드러나고, 그 시점은 불변이라는 고정관념이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세뇌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개인의 목적의식이나 추구하는 가치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더불어 함께 걷는 여정과, 같이 나누는 사랑의 교류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행복의 진실이 싹트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험한 계절에 꽃돼지분식의 이웃들은 훈훈한 사랑의 이야기를 만들어주었다.

하나뿐인 자식을 위해 평생 모은 돈을 써버린 할아버지의 노후는 너무나도 초라했다. 몇 푼 안 되는 노령연금을 쪼개 쓰는 할아버지는 친구들 만나기도 눈치가 보여 자주 외출도 못한다. 오래전 이민 갔던 친구가 잠시 귀국하던 날, 할아버지는 그 친구와 잠시나마 회포를 풀고 싶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아들에게 말했다. “아범아. 혹시 10만 원 빌려 쓸 수 있겠니?” 아들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버지, 손자가 내년이면 학교에 들어가요. 애들에게 쓸 돈도 항상 모자란 것 알고 계시잖아요.”

아들은 마음에는 걸렸지만 어쩔 수 없다고 자기합리화하며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하고 출근해 버렸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몰래 용돈을 드려 외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날 저녁 퇴근한 아들은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어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아직 유치원생인 아이가 밖에서 흙장난이라도 했는지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거실에서 돌아다녀 더욱 짜증이 났다. “여보. 애가 이렇게 더러운데 왜 아직도 씻기지 않고 있었어?”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아들 애지중지 키워봤자, 어차피 나중에 자기 자식 돌보느라고 우리는 신경도 안 쓸 거예요. 그렇게 보고 듣고 배우며 자라니까요. 그러니 저도 이제는 애한테만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살려고요.” 남편은 아침에 자신이 아버지에게 했던 행동이 기억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모는 자식이 배부르고 따뜻한가를 늘 생각하지만, 부모의 배고프고 추운 것을 늘 생각하는 자식은 적은 것 같다. 자식들의 효성이 아무리 지극해도 부모의 사랑에는 미치지 못한다.

효는 예부터 가족을 사랑으로 묶는 밧줄과 같은 것이다. ‘한 아버지는 열 아들을 키울 수 있으나 열 아들은 한 아버지를 봉양하기 어렵다.’는 독일의 속담처럼 어차피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 ‘내리사랑’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르내리는 사랑의 윤회는 어차피 돌고 돌아서 한 곳으로 모인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한 마음에서 시작하여 한 마음으로 귀결된다. 그것이 누구이던, 상대를 가리지 않고 사랑이라는 이름 하나로 충분히 빛난다. 부모자식, 부부, 형제, 이웃, 친지, 동료, 그리고 어떤 인연을 막론하고 우리의 사랑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며 의미다.

영국의 ‘브렌트’ 지역은 다문화 배경을 가진 빈민층 아이들이 많은 곳이다. 이 지역의 많은 아이는 영어를 제대로 말할 수 없어 학교 교육을 잘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아이들을 위해 35개국 언어를 공부한 선생님이 있다. 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있는 ‘안드리아 자피라쿠’는 우범지역에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학생들이 결국 범죄자가 되는 악순환을 끊고 싶었다. 안드리아 선생님은 아이들이 영어를 모르면 내가 아이들의 말을 배우면 된다고 생각하고 학생들의 다양한 민족적 구성을 고려해 무려 35개의 언어를 공부해 학생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학부모들도 자주 만나고 지역 경찰들과도 연계를 맺어 학생들이 폭력단과 접촉하지 않도록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님의 노력은 드디어 열매를 맺어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에서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와 개선에 관련해서 상위 5% 안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안드리아 선생님은 ‘두바이’에서 열린 ‘세계교사상(Global Teacher Prize)’을 수상하였다. “학생이 나의 말을 알아듣게 가르치기에 앞서, 내가 학생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노력한다.”

아직 어리고 약한 아이들을 향해 자신의 위치를 한 단계 내릴 수 있는, 진정한 눈높이 교육을 이행한 선생님께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민족과 국가를 초월해서 베푼 위대한 사랑의 마음을 깊이 새겨야 할 것으로 여긴다. 1895년,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아관파천’의 수치를 겪은 ‘고종’은 ‘민영환’과 ‘윤치호’ 등을 ‘러시아 특사’로 파견해 일본을 견제할 힘을 빌리려고 했다. 1896년 3월 10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축하사절로 참가한다는 명분으로 민영환 일행은 긴 여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제시간에 중국에 도착하지 못한 민영환은 ‘유럽행’ 배를 놓치고 서둘러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다시 배를 탄다. 태평양을 횡단한 민영환은 ‘캐나다 밴쿠버’에서 ‘미국’으로 입국하고 미대륙을 철도로 가로지른 후 ‘뉴욕’에서 ‘런던’행 배를 타게 된다. 런던에서 ‘독일 베를린’을 거쳐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한 민영환 일행은 대관식에 참석하고, 다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6개월 2일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지구 한 바퀴를 완전히 돌면서 ‘중국, 일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등 11개국 이상을 거치게 되었고, 힘 없는 조선을 위해 헌신했던 여정은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이 되어 버렸다. 이 여정을 기록한 여행기 ‘해천추범(海天秋帆)’을 보면 발달한 서구 문물을 직접 본 민영환이 받은 감동과, 그 발달을 조국에 들이고 싶은 안타까운 열망을 잘 알 수 있다. 여행은 즐거운 일이다. 누구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누구는 힐링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목적이 무엇이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마음에는 기대와 희망이 가득하기 마련이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 지사인 민영환의 세계 일주 출발에는 조국에 대한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더 큰 절실함과 걱정, 아픔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세계 일주가 되었지만 조국을 생각하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던 슬픈 여정이었다.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는다.” 라고 절절한 애국의 심정을 토로했던 민영환의 나라 사랑은 현대에서도 오롯이 귀감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시작은 용서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으로 후세에 깊은 감명과 감동을 이어주기도 했다. 용서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랑은 용서하는 것이라 한다.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큼 참된 사랑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용서는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상대방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보복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하지만 보복은 보복을 낳는 법이다. 확실히 상대방을 보복하는 방법은 그를 용서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처지가 되어 살아보아야 하고 그 사람의 마음 속, 아니 꿈 속에까지 들어가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설령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상대방의 실수를 용서해주자. 나도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때때로 그렇듯 일이 잘못될 때, 앞에 언덕길만 계속되는 것 같을 때, 주머니 사정이 나쁘고 빚이 불어날 때, 웃고 싶지만 한숨만 나올 때, 근심이 마음을 짓누를 때, 쉬어야겠다면 쉬자. 하지만 포기하지는 말자. 때때로 그렇듯 인생이 풍파로 얼룩질 때, 실패에 실패만 이어질 때, 잘하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을 때, 걸음을 늦추더라도 포기하지는 말자. 한 번만 더 해보면 성공할지 모르니까 말이다.

힘들어 머뭇거려진다면 기억하자. 목표가 생각하는 거기보다 가까이 있는 때도 많다는 것을. 조금만 더 하면 승자가 될 수 있었는데 노력하다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금관이 바로 저기 있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기도 한다. 이미 슬그머니 밤이 온 후에야. 성공은 실패를 뒤집어 놓은 것, 사실상 당신은 성공에 가까이 다가온 거다. 멀리 있는 듯 보이지만 성공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너무 힘들다고 생각될 때도 끈질기게 싸워보자. 최악으로 보이는 상황이야말로 포기하면 안 되는 바로 그 때이니까 말이다.

어차피 세상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고단한 여정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니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아내지를 못했을 것이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이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하여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귀한 선물이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 미숙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이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게 살아왔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준 귀한 선물이었다.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야 물에 휩쓸리지 않고, 화물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바퀴가 돌지 않듯이 내 등의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하나를 잘 넘게 하였다. 내 나라의 짐, 가족의 짐, 직장의 짐, 이웃과의 짐, 가난의 짐, 몸이 아픈 짐, 슬픈 이별의 짐들이 내 삶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하였다. 자세히 보니 그 짐들은 모두 사랑의 다른 얼굴이었다. 그리고 사랑을 표현하게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이제 필자는 다시 말한다. 우리의 모든 날들이 모이고 모여 길고 긴 삶의 이야기를 써가고 있다. 어떤 날은 슬픔과 아픈 날의 이야기를, 또 어느 날에는 기쁘고 즐거운 이야기를. 우리의 생각과 의지대로 살아지지 못하고, 작심한대로 써지지 않아서 때로는 흡족하지 않고 불안하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좌절도 중단도 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일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반겨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통과 역경을 견디고 이루어낸 내일의 보람과 소망이, 진정한 행복의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우린 지금 확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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