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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림삼초대시 '행기'(行記)9

때로는 사람을 일컬어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도 하는 게 아닐까?



림 삼 / 칼럼니스트. 작가. 시인

詩作NOTE -

 

림삼 제 3시집당신은 나의, 나는 당신의에 수록되어 있는 시이니 이 시도 퍽이나 오래 묵은 시다. 물경 서른 살은 됨 직하다. 사회생활을 딴에는 제법 열심히 해내면서도 한 편으로는 뻔질나게 돌아치던 시절이었는데 이른바 행기 시리즈라고 이름 붙여 꽤나 여러 편의 시를 적었던 기억이다. 가는 곳곳 마다 수북히 쌓이는 감성이나 소회가 묻어나도록 일기처럼 적었던 기행시들이었는데 지금에사 되돌아보는 감동이 여간 솔찮은 게 아니다.

 

물론 당시의 흥분이나 기억이 다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단편적으로 생각키워지는 추억들이, 버거운 오늘을 살아가는 데 톡톡히 양념 역할을 하고 있음에 적잖은 위로가 되어진다. 모름지기 사람이 살아가는 원동력은 내일을 향한 꿈이나 계획도 필경 한 몫을 하는 거지만, 지난 날의 아름다웠던 이야기들이 단단히 엮이어져서 힘을 끌어내게 하는 근원이 되어진다는 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때로는 사람을 일컬어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도 하는 게 아닐까?

 

어떤 이는 우리에게 이런 제언을 한다. “가슴이 떨릴 때 떠나야지 다리가 떨릴 때 떠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고보니 이젠 필자도 나이가 제법 들은 셈이다. 변변히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시도를 해본 적이 언제인지 모를 정도이니, 지금에 와서는 실질적인 실천보다는 제 자리에 주저앉아 지난 추억에 의존하여 여행의 참맛을 곱씹는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짓거리가 되어버린 셈이다. 참으로 세월무상이요 격세지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지금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가장자리에 얹힌 계절이다. 멀리 보이는 산이나 들에는 온갖 기화요초들이 잘난 폼을 자랑하며 손짓을 한다. 물론 코로나 19’로 인하여 마음 편하게 자연의 풍광을 즐길 여유나 기회를 잡기가 쉬운 노릇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뜻이 있고 생각이 있다면 어딘가 한 번 쯤 훌쩍 떠나보는 것이 그리 탓할 일은 아닐진대, 도무지 이 무거워진 엉덩이는 엄두를 내기조차 겁을 내니 이게 나이 먹은 늙은이의 작태가 아니고 무엇이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가슴이 있거늘 사실상 늙고 젊고의 차이가 있는 건 아닐진대 어째서 구구절절이 이유를 늘어놓고 있는 건지, 어찌보면 한심하고 가련하기까지 하지만 스스로 알아차릴 때까지는 누구도 필자의 심장에 뛰어들어와 감놔라 배놔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예컨대 사람은 숨이 멈추는 그 날까지 중단 없는 배움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느끼고 깨달으며 나이를 먹어가는 여정이 곧 삶의 제목인 셈이다.

 

첫째 날, 사랑하는 이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그 동안 목소리로만 듣던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겠습니다. 오후에는 시원한 숲속을 거닐면서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황홀한 저녁 노을을 보겠습니다. 당연히 그날 밤은 너무 감격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겠지요.

 

둘째 날, 새벽 일찍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감동적인 순간을 보고 싶습니다. 아침에 들를 곳은 미술관입니다. 그동안 나는 예술품들을 손으로 만져서 감상해왔습니다. 촉감으로 느끼던 그것들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다음에는 극장이나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촉감으로만 느끼던 것들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면 그 스릴이 정말 대단할 거예요.

 

셋째 날, 다시 한 번 해가 뜨는 광경을 바라보겠습니다. 그 다음엔 거리로 나가 사람들이 오가는 광경을 바라보겠습니다. 빈민가, 공장, 아이들이 뛰어 노는 놀이터에도 가보겠습니다. 외국인들이 사는 지역도 방문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외국 여행을 대신할 수 있겠지요.” ‘내가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으로 한 헬렌 켈러의 말이다. 가슴을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어찌 세월을 탓하고 나이를 핑계댈 수 있을까?

 

어느 땐 바로 가까이 피어 있는 꽃들도 그냥 지나칠 때가 많은데, 이 쪽에서 먼저 눈길을 주지 않으면 꽃들은 자주 향기로 먼저 말을 건네오곤 합니다. 좋은 냄새든, 역겨운 냄새든, 사람들도 그 인품 만큼의 향기를 풍깁니다. 많은 말이나 요란한 소리 없이 고요한 향기로 먼저 말을 건네오는 꽃처럼 살 수 있다면, 이웃에게도 무거운 짐이 아닌 가벼운 향기를 전하며 한 세상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다면...”

 

이해인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중에 나오는 글이다. 꽃도 사람도 저마다 향기를 낸다. 그러나 거기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꽃의 향기는 타고 나지만 사람의 향기는 선택되고 창조되고 새로워진다. 향수도 좋은 방향제다. 그러나 눈빛과 얼굴, 말씨와 걸음걸이, 마음과 영혼에서 풍겨 나오는 내면의 향기를 따르지 못한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일들이,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삶을 누리는 그 일들이, 우리의 향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주고, 발하게 하고, 그리고 취하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들이다.

 

참 많은 이웃들과 어울리다 보면 참 많은 경우에 부딪치게 된다. 이럴 때 겪게 되는 많은 상황들에서 우리는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는 것도 살아가는 도리다. 눈처럼 냉정하다가도 불처럼 뜨거워야 함은 물론이고,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야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과제다.

 

교만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한 삶,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한 삶, 역경이 닥쳤을 때든, 그것을 극복했을 때든, 늘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삶, 유연하되 원칙을 잃지 않는 삶, 어려울 때마다 근본으로 돌아가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삶,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필자는 늘상 기원한다. 한 채의 집을 짓듯이 그렇게 필자는 오늘도 삶을 짓는다.

 

주관적인 나와 객관적인 나 사이에는 인문적 사유가 필요하다.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주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주체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자신의 존재를 주체로 인식한다. 그런 점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존재가 된다. 이런 의타적인 성향은 인간관계를 수단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자기 자신을 스스로 느끼고 이해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가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는 자기보호 본능이 강하고 타인에게 자신의 내면을 숨기려는 경향을 가진다. 이를테면 타인이 인정할 만한 것만 보여주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한다. 보통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비교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한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타인에 의해 상처받는 이유도 상대는 눈에 보이는 객체이고, 주체인 자신은 실체를 느끼지 못하는 불확실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상대가 하는 말이나 행동은 분명하게 보이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는 주체성을 느끼지 못해서다. 그렇다고 주체성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주체가 강해질수록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사이의 괴리는 더 커져가고, 자칫하면 고착관념화 되어 소통하기 힘든 자기 안에 갇힐 수도 있다. 따라서 주관적인 나와 객관적인 나 사이에는 반드시 인문적 사유가 필요하다. 사유를 잘못 이해하면 양심에 내맡기는 것으로 오인할 수 있다.

 

양심이 어느 정도 사람을 자각하게 할 수는 있지만 사유를 통해 깨닫는 것과는 다르다. 사유는 나라는 주체를 넘어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알아차리는 인식의 세계이고, 언제든 제한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나 이상의 그 무엇을 처음부터 요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무엇으로 나를 증명해 보일 수 있을지 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했을 것이고, 그 고민의 결과물들이 고전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의문과 질문 앞에서 이렇다 할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살아있는 사람은 끝내 찾지 못하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며, 죽은 자만이 그 답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하며, 그 대답 없는 질문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주관과 객관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하는 나이다. 조금은 딱딱하고 관념적인 견해를 적은 것 같아서 머리 아픈 주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자신을 알아가는 탐구의 여정일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강조하고 싶다. 누구도 가장 적당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화두이다.

 

사업을 하는 지인의 어머니는 98세에 돌아가셨다. 말년에 형님 내외가 어머니를 모셨는데,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자꾸 집을 나가 길을 잃어버리고 이상한 행동을 해서 형님과 형수가 무척 힘들어했다. 둘째 아들인 지인은 그 당시 사업이 잘 되지 않아 이혼을 하고 혼자 노숙인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형수에게 전화를 걸어 찾아뵙겠다고 말했다. 형수는 어머니에게 그 말을 전했고, 둘째 아들이 온다는 말에 어머니는 들떠서 어쩔 줄 몰랐다.

 

저녁 시간이 되어도 둘째 아들이 오지 않자 할 수 없이 어머니 식사를 먼저 차려 드렸다. 그런데 어머니가 식사를 하는 척하며 음식들을 몰래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다. 가족들이 보고 놀라서 말렸지만, 어머니는 악을 쓰며 맨손으로 뜨거운 찌개 속의 건더기들까지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누가 빼앗기라도 할까 봐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밤이 되어서야 둘째 아들이 왔고, “어머니, 저 왔습니다.” 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온통 한데 뒤섞인 음식들을 꺼내놓으며 말했다. “아가, 배고프지? 식기 전에 어서 먹으렴.” 어머니의 손을 봤더니 뜨거운 찌개를 주머니에 넣느라 여기저기 데어 물집이 잡혀 있었다. 아들은 명치께가 찌르듯 아파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저 어머니를 덥석 안았다. 어머니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둘째 아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나 보다.

 

어머니는 자식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서는 내 한 몸 부스러지는 것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아무 희망 없이 살아가던 지인은 어머니의 그 물집 잡힌 손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생수 배달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튼실한 중소기업을 일궈내고 당당히 일어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한참 지났지만 지금도 힘든 날이면 어머니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고 했다. “아가, 배고프지? 식기 전에 어서 먹으렴.”

 

봄이 가기 전에 얼른 변변한 추억꺼리 하나라도 장만하고 싶은 조바심에 안달이 나서, 어딘가로 여행 한 번 떠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필자는 오늘 아침 다시금 주저앉았다. 대관절 나는 무엇을 찾으러, 무엇을 경험하러 떠나려고 하는 거였을까?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숨을 쉬며 세월을 바라본다는 것,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며 순리를 터득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내면의 숨겨진 무언가를 찾는 삶의 여행임이 분명하다는 확실한 명제 앞에서, 필자의 올 봄 여행은 또 다시 방구석 뺑뺑이가 되어질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꿀꺽! 차라리 행복한 포기와 체념을 얹은 침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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