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삼 /칼럼니스트. 작가. 시인
- 詩作NOTE --
필자는 ‘해후(邂逅)’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작품에서 비교적 자주 언급하고 인용하기도 하는 단어다.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에 다시 만남’이라고 사전에서는 그 뜻을 풀이하고 있다. 내막을 살펴보면 다섯 가지의 상황을 나열한 문장이다. ‘오랫동안’ ‘헤어짐’ ‘뜻밖’ ‘다시’ ‘만남’. 어느 것 하나 만만찮은 단어다. 나름대로 깊은 의미와 함축된 속내가 담겨져 있는 멋진 말이다. 그렇기에 실상 필자 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넉넉한 의미를 주는 단어가 바로 이 ‘해후’가 아닌가 싶다.
한 단어에 이렇게 다양한 여건이나 감정의 함축이 오롯이 숨겨진 예는 찾기 쉽지 않다. 그래서 수많은 문학 작품이나 영화, 드라마의 제목, 또는 노랫말로도 많이 애용되는가 보다. 아울러 이 단어는 ‘추억’ ‘감동’ ‘인연’ ‘향수’ ‘동행’ 등의 다분히 감성적인 많은 단어들을 아류로 연관시키는 매력이 있다. 단순히 ‘해후’라는 어떤 일시적이고 현실적인 만남으로 제한하지 않고, 그보다 훨씬 이전의, 그리고 더 먼 나중의 예측되는 낭만까지도 아우르는 묘한 힘이 있어서, 끊임없이 우리의 상상과 탐심을 자극한다.
오늘 고른 이 시의 제목에도 굳이 ‘해후’라는 말이 들어갈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그냥 ‘그믐날 밤’만이라면 다분히 돌파구 없는 음습하고 퇴폐적인 필자의 심상을 표현하는 데 그치고 말 것이지만 이 멋진 단어를 슬그머니 덧입힘으로써, 비록 현실은 불안하고 암담할지언정, 내일을 기다리는 염원과 갈증을 한 켠으로 슬쩍 걸치는 모양새가, 나름 필자의 숨겨진 은근한 미련과 애교 섞인 투정의 방편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과연 누구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일까? 어떤 만남을 기대하면서 달이 저물어 사윌 때까지 잠 못 이루며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을까? 궁금하기가 첩첩산중인 필자의 심연이 필자는 자못 궁금해진다. 향후 이 ‘해후’는 예컨대 필자의 탐심을 파고들어 시리즈로 엮일 조짐이 있다. 그래서 기대하는 바가 크다. 물경 엄청난 사랑의 스토리로 되짚어질 ‘그믐날 밤의 해후’는 다른 어느 날의 숱한 해후들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만남과 그 인연을 맺어갈 태세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따뜻한 사람은 따뜻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모름지기 우리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솔직하고 따뜻하게 상대를 대하므로, 상대가 우리에게 따뜻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을 못 만난다며 투덜대기 전에, 스스로가 어떤 생각으로 상대를 대하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할 거다. 오늘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좋은 만남이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인생의 여정을 지나는 과정에서 순간의 기쁨과 감동은 눈 감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린다. 바로 이처럼 인생의 많은 시간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흔히들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다고 불평한다. 대개 돈도 있고 시간도 있는 경우에는 즐기려 해도 되레 건강이 허락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이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의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
그렇게 내일이 오면 또 다시 과거에 연연한다. 이런 버릇으로만 이어지는 삶이라면 그건 정녕 정말이지 통탄할 노릇이다. 대관절 우리의 오늘은 어디 있는 걸까? 과거는 유효 기간이 지난 휴지 조각이며, 미래는 불확실한 어음이지만, 오늘은 가치있게 사용할 수 있는 현찰이라는 이 흔한 말이, 사실은 우리가 그냥 흘려 듣고 말아서는 안 될 정말 대단한 삶의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자고 나면 모든 게 변화하고 진보하는 정신 없는 세상, 조금 천천히 가고 싶은데 세상은 너무 바쁘게, 기다림도 여유도 없이 달려가라고 자꾸만 재촉을 한다. 한 마디로 세상이 너무 빨리 달리고 있다. 빠르면 좋은 것도 있겠지만 놓치는 것도 많을 터인데... 숨이 턱에 차고 지쳐 쓰러질 듯 목이 마르는데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해야 하는 건가? 멈추고서 오래도록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름답고 고운 것도 많고 많을텐데, 바빠서 보지 못하고 놓쳐버리는 아쉬움들은 또 어이할 건가?
파아란 하늘도 보고 싶고, 피어나는 예쁜 꽃도 보고 싶은데, 하늘은 언제 보았는지, 달님은 언제 보았는지, 기억 저 편 멀리에 있지는 않은가? 길을 걷다가 벤치 하나 있거든 감사한 마음으로 가만히 앉아 천천히 바라보는 여유 하나 쯤 가져보는 건 어떨까? 가능하다면 조급해 하지 말자. 급한 사람은 실수가 많아진다고 한다. 화를 내지도 말자. 자칫 이성을 잃어 가슴을 멍들게 한다고 한다. 시기, 질투도 하지 말자. 그러다가는 창조와 생산이 중단된다고 하는데.
그리고 낙심하지도 말자. 절망이 눈덩이처럼 불어날지도 모른다. 외로워해서도 안 된다. 세상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아니 나 자신이다. 또한 우리는 못남을 한탄하지도 말자. 이 말은 그 모습 그대로 승리를 보이라는 뜻이다. 할 수 있다면 남을 속이지도 말자. 그건 몸에 종기를 키우며 사는 것과 같다고 한다. 게으르지도 말자. 스스로를 파괴시키게 된다는데. 절대로 얼굴을 찡그리지도 말아야 한다. 인생의 승패가 얼굴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금지해야 할 게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지켜야 할 것도, 지속시켜야 할 습성도 참 많고 많다.
필자가 확실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수많은 여건들 중에서 어떤 방향으로 선택을 하고 어떤 기회를 창출해나가느냐 하는 마음가짐의 문제다. 위기를 얼마나 잘 피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일찍 위기를 만나서 잘 극복하고, 다음 번 위기로 넘어갈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위기를, 살아가는 동안에 담아낼 수 있었는지로 사람의 능력이 판단된다는 점이다.
위기는 또 다른 위기를 부른다. 그러나 위기를 잘 극복해 넘어서면 그 위기가 오히려 다시 없는 기회로 바뀐다. 그것을 우리는 ‘전화위복’이라 말한다. 오늘의 위기는 다음에 다가올 위기의 예행 훈련이며, 전화위복의 좋은 기회다. 그렇기에 매일 매일이 이어지는 위기와 기회의 교착점인 것이며, 또한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기 위한 변곡점인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기가 힘들겠지만 어쩌겠는가? 힘을 내야지.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필경 좋은 일이 생길 거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물론 이런 말들이 다 옳은 말이긴 하다. 그런데도 정작 힘들어하는 상황에서는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말들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은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이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따뜻한 한 마디다.
그리고 그 한 마디는 특별한 것도 아니요, 별 다른 것도 아니다. 바로 이 한 마디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힘을 내라는 말은 너무나 흔하고 식상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힘을 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읽어주고, 하나가 되어주는 것이다. 알다시피 내버려둬도 만사는 어차피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인생이란 그런 거다.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우리도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니까 이제는 그런 인생살이를 슬슬 배워도 좋을 무렵이다. 우린 때때로 인생을 지나치게 자기 방식으로만 끌어들이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다가 정신 병원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좀 더 마음을 열고, 인생의 흐름에 우리의 몸을 맡겨보자. 그렇게 해보니 필자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사람도 때로는 산다는 게 근사하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정말이다, 이건. 그러니 우리 모두는 더욱 더 행복해져야 한다. 행복해지는 노력을 하자. 그믐날 밤이 지나면 바로 초승달 뜨는 밤이 오고, 이어서 반달과 만월로 이어지는 밝은 달밤이 올 건 당연한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