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삼/칼럼니스트.작가.시인
- 詩作NOTE -
1월 말, 한 겨울의 한 가운데, 그리고 긴 설 연휴가 이어지고 있는 우리 삶의 한 페이지가 그렇게 색을 입히고 흐른다. 하얀 색이다. 온 누리가 하얀 눈에 뒤덮여 온통 하얀 색으로 세상을 채색하기도 하는데, 눈에서 조금 벗어날라치면 하얀 별들이 무수히 반짝여 겨울밤의 하늘을 다시 하얗게 물들인다. 그러면서 하얀 세상의 대자연은 하얗게 빛나는 미소로 우리를 감싸준다. 그 속에서 오로지 하얗지 못한 건 사람 뿐이다. 그래서 부끄럽다. 언제부터인가 인심이, 인정이 하얀 색을 잃어버리고 칙칙한 회색빛을 띠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그저 냉혹하고 어두운 검정색으로 변해버렸다.
깜깜하다. 두 눈을 부릅떴는데도 아무 것도 안 보인다. 길도 안 보이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도 아예 안 보인다. 분명 소리는 들리는데 여기는 그냥 나만 홀로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실상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걸, 보지 못하는 걸, 볼 이유도 필요도 없이 외롭게 존재하며 승리자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개체, 불쌍한 현대인들만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오염된 세상에 오염된 사람들로 넘쳐나는 하늘에서는 눈조차 하얀색으로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게 원망스러워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몸부림치며 대성통곡을 하다가 겨우 잠에서 깼다.
휴! 꿈이었구나. 흑암의 지옥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몸짓 그대로 잠시 손발을 주무르다가 차츰 안정을 되찾는다. 신새벽으로 달리는 창을 내다보니 온통 하얀 눈이 누리를 뒤덮고 있다. 밤 새 저리도 하얀 눈이 찬란하게 내려 쌓였구나. 세상을 정화시키고 밝은 빛으로 더욱 일출의 햇살마저 황홀하게 만드는 하얀 눈의 마술같은 매력에 잠시 숨조차 멈춘 채 창밖을 바라본다. 지난 밤 손 모아 눈바라기하며 애타게 기다린 보람이 있다. 겨울의 맛은 역시 눈이지. 겨울의 멋은 이토록 하얀 세상인 거고...
하얀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하얀 마음이 어울린다. 하얀 얼굴로 하얀 인사를 나누는 하얀 사람들이라야 더없이 정겹고 보기 좋다. 하얀 관계들이 하얀 인심으로 흐르다가 서로의 하얀 마음으로 가늘게 나누어지며 하얀 입김과 하얀 미소로 섞이게 한다. 그렇게 오묘한 조화로움으로 하얀 세상이 만들어지는 건가 보다. “이거 비싼 커피야.” 라는 말보다는, “너에게 주고 싶은 향기야.” 라고 말하며, 정성껏 커피를 내려주는 하얀 사람이 더 좋다.
“이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알아?” 라는 말보다는, “네가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아.” 라고 말하며, 수줍게 직접 고른 옷을 선물하는 하얀 사람이 더 좋다. 돈이 아닌 마음을 보여주고, 높이가 아닌 깊이를 보여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된다. 사람 마음을 얻는 게 가장 힘든 일이지만, 반대로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하다. 그저 느끼는 그대로, 주고 싶은 마음 그대로, 하얀 색을 보여주면 되니까 말이다. 하얀 색은 하얀 색을 쉽게 알아본다.
얻으려는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주려는 마음의 명령만 그대로 따르면 되니까, 마음만 보며 나아가면 된다. 마음을 주면 마음을 받는다. 하얀 마음은 하얀 마음을 부른다. 하얀 마음은 하얀 사랑을 사랑한다. 이 세상을 사랑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록 남는 것이 말 뿐이라 해도, 사랑은 늘 평화롭게 살아간다. 끔찍한 최악의 관계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듣고싶어 하고,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말을 가장 듣고싶어 한다.
사랑은 표현이다. 인정 받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된다.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아무 것도 모르기 마련이다. 생각에 머무르지 말고 입 밖으로 내어놓으면 된다. 그래서 오늘도 따뜻한 말 한 마디 “사랑해!”로 아침을 열면 바로 하얀 세상이 열리게 되는 거다. 참 쉽다. 누구나 하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뭉클하고 가슴 벅찬 환희인가 말이다.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일인데, 세상에 향기를 가득 뿌리는 주관자가 되는 일인데.
하나 밖에 없는데도 기꺼이 나눌 줄 아는 사람, 나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삶을 아는 사람, 내가 먼저가 아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말 한 마디라도 기분 좋게 할 줄 아는 사람. 궂은 일도 망설임 없이 두 팔 걷고 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다. 꽃의 향기는 사람의 얼굴을 미소짓게 하고, 사람의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웃게 한다. 사람의 향기는 하얀 세상의 꽃밭을 만들어가는 생명수며 숨결이 된다.
말 없이 마음이 통하고, 그래서 말 없이 서로의 일을 챙겨서 도와주고, 그렇기에 늘 고맙게 생각하고, 서로서로 그런 사이가 되는 게 하얀 인정의 고리다. 방풍림처럼 바람을 막아주지만 생색내기 보다는, 바람을 막아주고도 한결같이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처럼, 그렇게 있으면 그게 하얀 인심의 정이다. 물이 맑아서 산 그림자를 깊게 안고 있고, 산이 높아서 물이 깊고 푸르게 만들어 주듯이, 그렇게 함께 어울리는 것이 하얀 인연의 탑이다.
산과 물이 억지로 섞여 있으려 하지 않으며, 산은 산대로 있고, 물은 물대로 거기 있지만, 그래서 서로 더 아름다운 풍경이 되듯, 그렇게 우리가 각각 자기 자리에 평화롭게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인생 길은 경주가 아니라, 가는 걸음 걸음을 잘 음미하는 여행이다. 그러다가 사람을 만나서, 사람들과 정을 나눔은 우리에겐 축복이고 행운이다. 변함없는 우정의 친구로, 세월을 하얀 마음으로 서로 함께 사랑하며, 정다운 길동무, 말동무로 인생 길 걸어간다면 그게 바로 하얀 삶의 행복이다.
앞으로도 우리 삶에는 무수한 난관과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지기도 할 것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상처를 받으며 자라나는 나무와 같다. 비바람을 맞지 않고 자라나는 나무는 없다. 그처럼 우리의 살아가는 길에도 수많은 비와 바람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때로는 비바람에 가지가 꺾어지듯이 아플 때도 있다. 하지만 아픔으로 인해 나무는 더 단단해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가진 한 때의 아픔으로 인생은 깊어지고 단단하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비와 바람은 멈추게 된다. 그게 바로 하얀 삶으로 향하는 길이다.
인생이 매 번 상처만 받지는 않는다. 비와 바람은 지나가는 한 때임을 생각해야 한다. 비와 바람을 견디고 핀 꽃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다. 하루를 소중히 사는 사람은 내일의 기약을 믿고 산다. 하얀 마음으로 기다리는 내일은 필경 하얀 내일일 거라는 믿음으로 산다. 처음엔 쓴 맛에 멀리 해도 한 번 두 번 삼키다보면 깊은 맛에 빠져들게 된다. 우울할 땐 설탕을 풀고, 눈물이 날 땐 프림을 넣으면 된다. 이게 뭘까?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며, 사랑으로 가슴이 벅차 오를 땐 하얀 잔에 행복한 모습을 비춰주는 이것. 어쩌다 쓴 맛으로 우리를 괴롭힐지라도 익숙해진 그 맛에 잊지 않고 다시 찾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의 친구, 우리는 하얀 함박웃음으로 커피를 마신다. 하얀 모닝커피 한 잔으로 하얀 하루를 열며 하얀 세상을 그윽히 바라본다. 하얀 눈이 가득한 하얀 누리를 행복하게 바라본다. 겨울이다. 하얀 겨울. 어느새 나는 하얀 사람이 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