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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림삼초대석 '터벅 터벅'

그만큼 길고도 먼 여정을 표현할 가장 적당한 말이 어쩌면 ‘터벅 터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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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삼 / 칼럼니스트. 작가. 시인

詩作NOTE -

 

느릿느릿 힘없는 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양을 표현할 때 터벅 터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단어 자체에 어떤 심오한 뜻이 내포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웬지 느낌 자체가 조금은 염세적이고 퇴폐의 냄새도 묻어난다. 그저 적절한 보폭이나 속도를 유지하면서 걷는 모양새가 아니고, 마치 방향이나 지표 자체가 설정되지 않은 채 방황하며 나아가는 모습도 엿보인다. 비단 걸음걸이에서만 이런 표현을 쓰는 건 아니다.

 

가수 ‘Sinny’의 노래 중에 터벅 터벅이라는 제목이 있다. 틀에 박힌 일상 속에서 자신의 꿈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표현한 노래다. 어느 날 손에 난 상처 위에 생긴 딱지를 보고 떼어낼까, 말까 갈팡질팡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마치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현재 세대의 상황과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Sinny는 꿈을 향한 자신의 발걸음이 맞는지, 어떤 것이 옳은 길인지 모두가 한 번쯤 고민하는 것에 대하여 자기만의 감성으로 곡에 풀어냈다. 단순한 걸음이 아닌 전반적인 삶의 모습을 투영시킨 은유적 표현의 걸작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한 평생 살아가면서 정말 치열하고 처절하게 일상의 사연을 메꿔간다. 때론 피 흘리며, 혹은 눈물로 밤을 지새며 버거운 하루들을 채워나가기도 하고, 또는 작고 큰 행복에 겨워 기쁨으로 주어진 나날을 영위하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주저리 엮어가면서 삶이라는 일기장을 써내려간다. 그만큼 길고도 먼 여정을 표현할 가장 적당한 말이 어쩌면 터벅 터벅일지도 모른다. 조급해서도 안 되고 서둘러서는 더욱 안 된다.

 

상황에 따라 돌아가야 할 때도 있고 잠시 멈추어 서서 숨을 고르는 게 상책일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떨 때는 조금 뒷걸음을 치거나, 아예 뒤돌아 서서 후퇴를 해야 할 경우도 생겨난다. 예컨대 일정치 않은 보폭과 속도로 걸어가야 하는 인생길이라면 어차피 터벅 터벅 걸어간다는 마음가짐으로, 온 몸에 힘을 빼고 맥없이 걸어가는 게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 그냥 그렇게 힘만 빼버리는 게 아니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적절한 자기 계발과 반성을 통한 발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그동안 지내온 삶의 과정 중에서 잘잘못을 스스로 가리면서 더 나은 방안을 강구하기도 한다면 그 걸음걸이가 터벅 터벅이던 타박 타박이던 누가 탓하랴. 오히려 바람직한 대인관계나 사물을 대하는 처세도 전보다는 훨씬 나은 행보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 결과도 눈에 띄게 좋을 가능성이 높다는 조건이라면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삶의 걸음걸이를 한 번쯤 되돌아 볼 일이다.

 

그렇게 깨달은 작은 철학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소소한 행복에 웃음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자신의 생각을 좋은 목소리에 담아 좋은 소리로 전달하는 아름다운 나눔의 마음도, 모두 이렇게 천천히 걸어가는 여유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다. 좋은 말은 아침 이슬과 같다. 이슬은 양은 많지 않지만 식물에게 큰 영향을 준다. 특히 사막 같은 지역에서는 이슬이 식물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좋은 말은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한 마디의 좋은 말은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으며, 때로는 사람을 살리기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내가 한 좋은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보다 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슬이 아침에 식물을 적셔주는 것과 같이 좋은 말을 해서 사람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준다면 좋은 말을 듣는 사람은 생명수를 공급받는 것과 같을 것이다.

 

좋은 말은 소망이 있는 말이다. 내 생각이 아무리 옳을지라도, 상대를 설득하려는 말과 책망하는 말은 때로는 소망을 끊을 수 있다. 사람은 모두 다르게, 자기만의 은사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내가 잘 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상대가 못 하는 것을 책망하고 강권하면서 따라하라고 할 때 상대는 죽어도 못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너무 강하게 요구하면, 상대의 소망을 끊어버리는 것과 같이 된다. 실제적으로 부모의 지나친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명을 끊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는 걸 볼 수 있다.

 

소망을 주는 말을 하자. 이슬과 같이 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말을 하자. 소망을 주는 말은 진실되어야 한다. 좋은 미사여구를 써서 우유보다 매끄럽게 말을 할지라도 진실되지 못한 말은 결국 상대를 찌르는 비수와 같은 것이 된다. 때에 맞는 옳은 말은 기쁨을 준다는 걸 늘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사고 방식을 관찰해보면 수직적 사고수평적 사고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수직적 사고란 어떤 대상을 생각할 때 자신보다 아래로 깔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사고 자체가 지극히 주관적 폄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말하며, 이와는 반대로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부자 혹은 명예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사고를 하는 것이 수직적 사고다. 사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수직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객관적인 균형에 맞는 사고 능력이 떨어지다보니 그로 인한 충돌에서 사회적인 불공정이나 불협화음이 생겨난다. 그건 자기 자신부터 잘못된 수직적 사고를 통해 대상을 판단하는 정확한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결과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사물 인터넷 시대에는 수평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고 요구되고 있다. 이를테면 자기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의 경계를 허무는 수평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대상과 내가 수평적 정보로 소통하면서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영역에서, 서로 통합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복융합형 인간을 말한다. 모든 창조나 창의적인 사고는 수평적 사고에서 나온다. 이것을 뉴턴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현상을 보더라도 거기서 새로운 생각을 유추해내거나 같은 대상을 관찰해도 늘 낯선 생각으로 새로운 통찰을 발견해내는 것을 말한다. 상상력을 발현하는 과정에는 수평적 관심, 수평적 관찰, 수평적 관계의 사유가 필요하다.

 

중국 명나라 말기 문인이자 화가였던 동기창은 이런 글을 남겼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여행한 다음에 비로소 붓을 잡아야 한다.” 자신이 읽은 책 몇 권으로 마치 지식과 지혜를 다 아는 것으로 여김을 경계하고, 자신이 본 것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 않는, 치우치지 않는 수평적 사고에 이만한 문장이 또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몇 년 전 갤러리에서 우연히 산 풍경(風磬)이 하나 있다. 그림이 아니고 처마 끝에 매달려 바람 따라 흔들려 우는 풍경이다. 못 박는 것도 어렵고, 마땅히 걸어 둘 자리도 없어 망설이다 달력 위에 걸었다. 그랬더니 한 달에 한 번, 달력을 넘길 때마다 손의 흔들림 따라 소리를 내었다. 늘 듣는 소리는 아니지만 풍경을 보면 저절로 산사(山寺)가 생각이 난다.

풍경은 바람 부는 크기와 소리가 듣는 이에 따라 각기 다른 음폭의 느낌을 갖게 하는 매력이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다. 그러한 풍경이 내 집에 오면서 공간이 아닌 달력에 기대어 있으니 산사의 소리가 날 이유가 없다. 놓여야 할 자리에 놓이지 못한 까닭이다. 모든 사물에는 어울림이 있다. 어울림이란 것은 크게 욕심 내지 않는다면 그 사물 자체로 빛이 나게 하는 것이다. 풍경은 바람이 지나는 길에 놓아 주어야 제 모습 그대로 빛이 되어 소리를 연주할 수 있다.

나름 고민을 하다가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걸 수 있는 준비를 했다. 세상이 아닌 자연을 볼 수 있는 위치에 매달게 된 것이다. 그동안 답답했던 가슴을 향해 맞바람 치도록 창문도 열어 놓았다. 서재 방까지 들려오는 풍경 소리가 제법 좋다. 바람에 잘 어울린다. 난간으로 옮겨진 풍경을 보면서 풍경의 주인은 내가 아닌 바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꿈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오랜만에 뵈었다. 아버지의 넓은 이마를 보면 삶의 고독이 묻어 있지만 멋이 있다. 주름 사이에 팔베개하고 새우잠 자도 남한테 손 안 벌리고 살면 최고다.’라는 생전의 신념은 여전하시다. 90평생 이승에 사시면서 자신의 유혹과 싸워 이겨낸 풍경의 언어다. 본성 그대로, 삶의 모습 그대로 전해주는 아버지만의 풍경소리는 공자의 노래보다도 활기차다.

가곡 중에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랫말을 음미하면 산사의 고즈넉함과 고요함이 절로 느껴진다. 눈을 감고 있으면 세상사 다 잊고 풍경 소리만 들릴 것도 같다. 주승에게는 잠의 안식을 줄 만큼 편안한 소리, 객에게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근심을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풍경이다. 요즘같이 잡음에 노출되어 있는 도시를 떠나고 싶을 때 생각나는 가사다.

가끔 이것저것 떠나서 그런 곳에 가보고 싶다. 잘 아는 산사는 없지만 인연이 닿는다면 한 번쯤 그런 곳에 가보고 싶다. 이왕이면 좋은 시를 빚을 수 있는 풍경을 만나길 바라며, 또 그러한 소리가 울리는 풍경이길 원한다. 일상의 풍경 속에 그윽한 소리가 아니더라도 사람 사는 모습을 좀 더 아름답게 채색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소리로 재현할 수는 없지만 노년의 언덕을 오르며 마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풍경은 공간을 비워 놓을 때 바람을 안아 소리를 낼 수 있다. 소리는 공간을 통해 자기 밖으로 나가는 순수한 외침이다. 외침은 공간 속에 소리와 만나는 관계로서의 탈 자아다. 소리의 탈출, 공간을 벗어남은 내 마음에 귀 기울여 자신의 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다. 분노함에 서두르지 말며, 비난함에 조급하지 말며, 질책함에 욕심내지 말자고 내면에 잠든 사유를 두드려 깨우는 소리다.

가을날에 바바리 깃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인생의 가을을 충전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마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어느 정도의 자유로움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벌레 먹은 사과 한 개의 상처도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여름을 견디어 온 눈빛 끝에도 지치지 않는 열정을 지니고, 삶의 고난도 평온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십일월 초순의 풍경 소리를 제대로 듣는 사람이다.

흐드러진 가을의 길을 걸으면서도 생의 온기를 느끼며, 어느 일순간 웃음이 절로 다가와도 주위의 아픈 사람들을 생각해 경망스럽지 않게 웃을 줄 아는 사람, 아무런 목적이 없는 말에도 미소와 끄덕임으로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 비록 자신만의 풍경으로 세상의 공간에 제 몸 흔들어 울려주는 풍경이 아니더라도, 가을빛을 닮은 평행선에 서 있지 못한다 해도 캔버스에 내 삶을 자유롭게 스케치하는 사람, 이 계절 데카르트적 성찰이 아니더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추녀 끝에 풍경이 되고 싶다.

 

터벅 터벅 가을의 끝을 걸어, 현실이라는 삶의 어느 한 정거장에 오래 기억될 쉼표 하나를 찍어두고 싶다. 훗날 누가 발견하여도 닮고 싶다는 부러움 담고, 작은 탄성과 감동으로 마주할 삶의 족적을 남기고 싶다. 지금 비록 이 삶의 현장에서 격하게 오늘과 싸움질하지만 끝까지 변치 않는 인성과 인본의 마음을 간직하려고 애쓰는 아름다운 몸부림의 사람이었다고, 그렇게 나의 비석에 새기고 싶다. 그런 고요함과 잔잔함의 제목을 사색하며 터벅 터벅 걸어가는 가을 막바지의 아침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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